여행에 대한 갈망
대학시절부터 나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완고한 어머니의 반대로 친구들과의 여행은 꿈도 못꾸다가,
대학1년, 교양학부에서 처음으로 '프로젝트73'이라는 리더쉽워크샵을 개최했다.
설악산 백담사를 출발하여 설악산을 종주하고 신흥사, 낙산해수욕장에 있는 학교별장에서
이틀간 휴식을 취항 후 강릉에서 해산하는 일종의 리더쉽웤샵이었다.
자격은 각과의 대표들과 신문기자, 교수님들과 교양학부직원등 거의 200여명의 대규모군단이었다.
나는 아직 신문사에 들어가기 전이었으나 영자신문사에 다니는 언니의 추천으로
함류하게 되었다. 교양학부장이신 국문과의 이병주교수님과 영문과의 오석규교수,오국근교수등 교수님들도 노구를 이끌고 설악산을 비맞으며 행군을 한 것은 나의 일생의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가 되었다.
내 키보다 큰 배낭을 짊어지고 집을 나서는 내게 어머니는 자식 넷 키웠지만 너처럼 극성맞은 애는 처음 본다며, 점잖고 조용한 다른 형제와
너무도 대조적인 나의 활동성을 의아해하셨다.
아직은 길도 터지지 않은 백담사에 걸어서 도착하던 시절이었다.
오래된 고찰이라 많이 쇄락한 모습의 절은 나중에 전두환대통령이 토임 후 국민의 원성을 피해 숨어지낼 때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그 당시는 한용운선생이 지내시던 작은 방을 비롯해서 조그마한 몇개의 방으로 구성된 그다지 크지않은 고찰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도착하니 스님들이 준비해준 음식의 양이 어마어마한 것으로 보아 그리 작기만한 절은 아닌가보았다. 밤이 되니 하늘에는 은하수도 흐르고, 어찌나 별이 총총한지 서울하늘의 뿌연 인공불빛에 별조차 몇개 떠 있지 않은 서울에 비하니 그조차도 내게는 처음 보는 놀라움이었다.
조를 편성하고 여학생과 남학생이 한조가 되어 식사와 행군을 같이 하다보면 어느 새 한 식구같이 된다.
교수님들도 그 때는 내가 영문과가 아니라 잘 모르는데도 이상하게 영문과교수님들이 내게 친절했고, 그 후에 영문과로 전과해서는 무척 귀여워 해주셨다.
교수님들도 수십분이 함께 가셔서 나중에 신문사에 들어가 취재를 가면 반가워하시곤 했다.
오세암, 봉정암,깎아지른 절벽을 지나 작은 봉우리에 지은 작은 암자들에서는 절마당에 텐트를 치고 자야만 했다.
법당에서는 여학생들을 재우고 남학생들과 교수님들은 텐트에서 자는데 그 높은 산속에서도 모기들은 맹활약을 했다. 남학생이 많은 학교라 여학생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더우기 여학생의 인기 최고가의 다이아몬드라는 1학년이고보니 짐을 들어주겠다는 남학생, 저녁이면 숙소로 찾아와 잠깐 얘기좀 하자는 남학생등 그 와중에도 청춘사업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설악산에서 비를 안만나면 비정상이라는 산악회회원의 말처럼 외설악 죽음의 계곡에 들어서니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우비를 장만하지않은 우리는 온몸이 비로 흠뻑 젖고 급기야는 배낭 속, 양말 속까지 물로 질척하다.
빗속의 말없는 행군이 끝난 후 도착한 곳은 권금성산장 -그날은 그곳에서 묵는다.
뒤져보아도 마른 옥이라고는 1,2게뿐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며 갈아입고 젖은 옷은 걸만한 곳은 모두 걸어 마치 유령의 산장이 되어버렸다.
그 때의 추억이 시발로 그때부터 나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여자라는 약점때문에 집에서 철저히 구속되었지만 그틈새로 해마다 한두번씩 결혼한 뒤에는 남편의 응원으로 수없는 나의 여행은 계속되었따.
대부분이 학교에서 경비를 지원하는 여행이었다. 운이 좋게도 그때부터 나의 여행는 거의가 학교나 단체에서 지원하고 늘 보호자나 가이드가 따르는 여행이다.
2학기가 되어 학교 신문사에 들어가니 철마다 기자세미나가 명승고적지의 사찰에서 개최되고 그에 대한 경비는 학교에서 모두 대주었다. 세미나가 끝나면 해수욕장에 가서 며칠 놀고 오는 식으로 끝없는 여행에 대한 욕구는 그렇게 해소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근무하게 된 학교에서도 약속이나 한 듯 방학이면 거의 의무조항으로 전국을 교사연수라는 제목으로 여행하였고, 첫 근무해부터 내가 맡은 학년은 어김없이 수학여행을 갔다.
어느 중년남선생님은 '김선생은 운도 좋아 오자마자 수학여행을 간다'며 자신은 십년넘도록 수학여행 한번 못갔단다. 그 후에 전근을 간 학교에서도 수학여행은 맡아놓고 가곤 했으니 여행운이 터진 걸까.
결혼하고는 잠시 잠잠했다가 아기를 낳고 1달된때부터 갓난아기를 안고 임진강,한탄강으로 캠핑을 가거나 수없는 여행을 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도 여행에 대한 갈망이 늘 있는 것 같다
국내에서만 머물지않고 남편이 항공화물에 근무하던 터라 출장을 가면 따라가곤 하던 여행이 당연한 것처럼 계속되었고 때로는 거래처에서 온 가족을 초청하기도 하는등 80년대에 나의 여행은 최고조에 달했던 것 같다.
그때는 외화를 낭비할까봐 해외여행을 규제하던 시절이라 외국에 여행을 가려면 절차가 복잡했다.
여행운이 있던 나는 아무런 규제없이 남편따라 한달씩 유럽에 머물면서 지사의 차로 지사장의 가족들과 국경을 넘곤 했다. 지금 아무리 여행을 많이 간다해도 아우디80을 타고 나폴리까지 호텔과 호텔을 연결하며 다니던 그 시절을 따라잡지 못할 것 같다.
여행에 대한 끝없는 갈망은 일상에 얽매여 사는 지금도 여전하다. 가면 갈수록 더 가고 싶어지는 것일까,
이제 생활에 대한 의무가 다 하는 날, 마음껏 지구 곳곳을 다니며 스케치여행을 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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