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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자-한비야

헬렌의 전화영어 2009. 4. 1. 23:03

 

 

한비야 “바람의 딸도 좋지만 이제 빛의 딸 되고 싶다”

노컷뉴스 | 입력 2007.02.23 16:36

 




"이제는 빛의 딸이 되고 싶어요. 태양처럼 큰 빛은 못되더라도 손안에 든 작은 촛불이나 등불 정도라도 제가 가는 곳은 밝고 따뜻하게 해주고 싶어요."

세계지도를 펼쳐 보며 '걸어서 세계일주'를 계획한 당찬 소녀, 친구들이 졸업하던 해인 25살에 대학에 입학한 늦깎이 대학생. 세계적인 홍보회사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다 느닷없이 사표를 던지고 여행 가방을 싼 '노처녀 직장인' 7년간의 오지여행을 책으로 펴낸 '베스트셀러 작가'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전쟁터든 재난 지역이든 어디든 달려가는 '긴급 구호 팀장'

'세상이 만들어놓은 한계와 틀 안에서 살지 않고 지도 밖으로 행군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힌 그녀는극한 상황, 안타깝고 괴로운 현장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 특유의 따뜻함과 적극적인 삶의 태도로세상은 먹고 먹히는 정글의 법칙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가슴을 뛰게 하고, 피를 끓게 만드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얼마나 황홀한 삶인지 온몸으로 보여주는 한비야 씨를 22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났다.

바람의 딸도 좋지만 이제 빛의 딸이고 싶다

▶ 한비야 씨는 사람을 굉장히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 제가 별명이 바람의 딸인데 사실 하고 싶은 것은 빛의 딸이에요.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밝게 만들어주니까요. 그래서 제가 태양처럼 큰 빛은 못되더라도 손안에 든 작은 촛불이나 등불 정도라도 제가 가는 곳은 밝고 따뜻하게 해주고 싶어요. 그렇게 하면 기분이 좋아요.

▶ 빛과 바람의 딸이군요. 얼마 전에도 어디 다녀오셨죠?

- 2~3일 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다녀왔는데요, 그곳에서 전 세계 긴급구호 요원들이 모여서 올해에는 어디가 긴급구호 지역이고 어디를 잘 예의주시해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 회의를 했어요.

▶ 올해는 어느 곳이 긴급구호 지역인가요?

- TV나 신문에서 재난에 대한 소개를 하지 않으면 세상이 잠잠한가 하는데, 그게 절대로 아니거든요. 예를 들면 쓰나미의 상처가 아직도 가고 있는 거고요, 파키스탄 지진의 상처가 아직도 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재난복구는 계속 진행되고 있고요. TV에서 보여주는 것은 그야말로 병원으로 보면 응급 수술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금방 사고가 나서 피가 철철 흐르는 사람을 수술실로 데려와서 어떻게든 살려내는 거기까지만 보여주잖아요. 하지만 그 사람이 수술이 잘 끝나도 중환자실에 가야하고 재활의 과정을 거쳐서 스스로 살 수 있을 때까지 도와주는 기간이 얼마나 길어요.

지금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특히 아프리카 지역의 가뭄과 홍수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어요. 가뭄이 계속 되었다가 조금만 비가 오면 홍수가 되고 홍수가 계속되었다가 조금만 비가 안 오면 가뭄이 되고. 그래서 그곳에 있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입에 들어갈 식량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아프리카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아니냐', '아무리 도와줘도 끝이 없는 것 아니냐' 하는데 그 사람들도 사람이잖아요. 일단 태어났으면 적어도 굶어죽지는 말아야죠. 전 세계 60억 인구를 모두 뚱뚱하게 만들 수도 있는 식량이 있다는데, 한쪽에서는 누군가가 세상에 태어나서 굶어 죽는 현실이 너무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 것 같아요. 그래서 당장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는 일이 긴급구호 일이고요, 아프리카는 지금 당장 우리 구호의 손길이 필요한 곳입니다. 그래서 올해는 연말까지 아프리카를 왔다 갔다 하며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 긴급 구호라는 게 뭡니까?

- 긴급 구호는 말 그대로 긴급하게 구호를 하는 것을 말하고요, 가끔 사람들이 '119구조대에 들어가셨다면서요?' 이렇게 말하는데요.(웃음) 비슷하죠. 긴급하게 사람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거예요. 재산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생명을 보호해서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거죠. 우리나라에서는 긴급구호라는 말을 쓰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냥 구호라고 해요. 그래서 구호에는 긴급구호가 있고 긴급한 게 끝나고 나면 재난 복구가 있고. 아까 말씀드렸듯이 병원으로 보면 긴급구호는 그야말로 응급수술실이에요. 예를 들어 교통사고가 났다, 재난이 난 거죠.

그러면 어떻게든 이 사람의 생명을 살려내고 그 다음에 살 수 있을 만큼 수술이 잘 되었다 하더라도 중환자실에 가야 하잖아요. 산소 호흡기를 꽂아야 하고 여러 가지 약도 맞아야 하는데, 그 과정이 재난복구 작업이죠. 그다음에는 회복하는데 시간이 더 많이 걸리잖아요. 혼자 이 사람이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거나 할 방법이 없잖아요. 그럴 때는 오랫동안 할 수 있는 개발 사업이 있어요. 하지만 이 사람들을 무작정 주거나 도와주는 것은 절대로 아니에요. 이분들이 살려고 하는 힘에 우리가 조금 힘을 보태는 거죠. 이분들이 펌프질을 하고 있으면 우리는 종자 물을 조금 갖고 가는 거예요. 아무리 펌프를 열심히 해도 종자 물이 있어야 펌프에 물이 나오는 거잖아요. 종자 물을 나누어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게 긴급구호 요원들입니다.

▶ 한마디로, 한비야 씨는 응급실의 팀장이네요.

- 맞습니다. 그래서 48시간 응급대기조거든요. 만약에 오늘이라도 쓰나미라든지, 대형지진이 났다 하면 국제본부에서 출동명령이 떨어져요. 그러면 저는 본인 사망 이외에는 어떤 경우라도 가야 해요. 48시간 이내에 가는 게 우리의 일이에요. 그곳에 가서 긴급한 응급수술실 역할을 하는 거죠. 못 올 이유는 본인사망 하나예요.

트럭 뒤 흩날리는 저 먼지가 다 밀가루였으면...

▶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새삼 느꼈는데, 긴급구호 팀장이 되신 배경이 궁금합니다.

- 제가 명색이 바람의 딸로 전 세계를 7년간 바람처럼 왔다 갔다 했는데요, 정말 다행인 것은 저는 처음 여행을 떠날 때부터 유럽이라든지 잘 사는 곳에서 멋진 낭만 여행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물론 그런 여행도 하고 싶지만 마음이 하얀 도화지 같아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렇게 젊은 나이에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가, 무엇에 행복해하고 무엇을 힘들어하고, 어떻게 하면 같이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 그것을 가장 궁금했고 마음껏 담고 싶었어요. 그래서 유럽이나 미국이나 이렇게 멋있는 곳은 나중에 나이 들어서 가도 된다고 생각했고 다리에 힘이 있을 때, 그리고 이렇게 호기심에 부풀어 있을 때는 사람을 많이 만나는 여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바로 오지여행이었지요. 우리나라 여행도 마찬가지잖아요.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왔는데 서울과 몇몇 좋은 곳만 왔다 갔다 하는 거랑 깊은 강원도 산골에 전기도 없는 곳에 가서 동네 사람들이 쪄 주는 감자나 옥수수를 먹으면서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완전히 다른 여행이잖아요. 저는 두 번째 여행을 하고 싶었어요. 정말 사람들과 섞여서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요, 다행히 오지에 있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도 봤지만 무엇에 힘들어하는가도 보았어요. 예를 들면 너무나 절대적인 가난, 엊그제까지 너무나 잘 놀던 아이가 며칠 동안 설사를 하더니 그 아이가 스르르 죽어버렸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알고 보니 설사병이 나서 탈수가 된 거예요. 탈수가 돼서 탈수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거예요.

사진만 찍으려고 하면 부끄러워서 혓바닥을 내미는데 까만 얼굴에 핑크색 혀가 얼마나 예쁜지 이름도 핑크 보이 원, 핑크 보이 투... 핑크 보이 24번까지 만들어서 함께 놀았는데... 갑자기 의성콜레라 같은 것이 돌면 2~3일 내에 그 동네에 조그만 무덤이 생기는 거예요. 그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것은 링거 한 병이에요. 그때 우리나라 환율이 1달러에 800백 원이었는데 링거 한 대 값이 800원이었어요. 생각해 보세요. 엊그제까지만 해도 재미있게 놀던 아이가 며칠 후에 설사 같은 시시한 병에 죽는데 800원이면 살릴 수 있었다는 거예요. 그때 제가 여행자였기 때문에 제 지갑에는 800원이 아니라 80만 원도 더 있었어요.

아이들을 예뻐하기만 했지 어떻게 살릴 줄은 몰랐던 거예요. 아이들에게 너무나 미안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제가 국제 홍보학을 전공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측은지심도 많고 인정도 많은 사람인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여행이 끝나고 나면 어떻게든 이 아이들을 돌보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7년 여행 내내 아프리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굳게 다지고 다지다가 지금은 제가 소원을 성취했잖아요. 월드비전이라는 국제구호기구의 팀장이 되었으니까요.

눈을 멀게 하는 독초인줄 알면서도 자식에게 먹이는 아프칸인을 보고 충격!

▶ 처음 간 곳이 아프가니스탄이었군요. 그때 갔을 때 어땠어요?

- 저는 사람이 굶으면 배가 고프고 살이 빠진다고 생각했지, 굶으면 죽는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것은 그냥 영화에만 나오고 소설책에 수사학적으로 나온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정말 굶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너무 기가 막혀요. 세상에는 음식이 충분히 있다고 하는데 이 아이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대단한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밥만 먹으면 사는데 굶어서 죽어가는 거예요. 어느 날은 한 마을에 갔더니 시금치 같은 풀을 먹고 있어요. 삶아 놓은 것을 보니 꼭 시금치 같아요. 그런데 알고 보면 독초라서 그걸 먹으면 눈이 멀어요.

세상에 어느 엄마가 독초인 걸 알면서도 그걸 삶아서 아이한테 먹이겠어요. 저는 처음에 그걸 보고 이 엄마가 제정신인가 싶어서 손을 뿌리쳐 가면서 이거 독초라고 했더니 그 아줌마가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통역을 통해서 들은 말인데 '이것을 먹고 죽으나 안 먹고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이 아이가 시금치 같은 것을 먹어서 당장에 배가 부른 것이 안 먹고 고스란히 굶어 죽는 것보다 낫다는 거죠.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통역하던 사람이 제 손을 꼭 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오늘 본 것을 절대 잊지 말아달라고 하더라고요.

그쪽 정부도 자국민을 어떻게든 살리고 싶지만 전쟁을 20년 동안이나 하니 나라가 돌아가지 않는 거죠. 차를 타고 그 모습들을 보면서 가는데 마음이 너무 무거웠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돈을 받아다가 밀가루를 사서 이 아이들을 살리고 싶은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나, 내가 정말 유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내가 유명하면 무슨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귀 기울일 거고, 도와줄 거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오는데 마주 오던 차가 가뭄이니까 뿌연 연기를 날리면서 우리 차 옆을 지나가는 거예요. 먼지가 휘날리니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저 먼지가 다 밀가루였으면..' 7년째 일을 하고 있지만 맨 처음에 사람이 굶어 죽는 아프가니스탄의 참상을 잊을 수가 없고 지금도 그것은 제가 조금 마음이 느긋해지려고 할 때마다 긴장을 하게 되는 첫 번째 각인된 현장이에요.

▶ 너무나 끔찍한 현장을 처음부터 본거네요.

- 지금 생각해 보면 왜 하나님이 이런 끔찍한 현장을 보게 하셨을까 정말 개인으로서는 정말 괴로운 일이잖아요. 제가 씩씩하게 보여도 눈물이 굉장히 많아요. 하지만 현장선 절대 울면 안 돼요. 제가 울면 현장 사람들한테 '긴급구호 팀장이 저렇게 울고 갔으니 반드시 우리에게 식량을 가져다줄 거다'하는 기대를 주는 것이거든요. 그래도 그렇게 끔찍한 현장을 보고, 예쁜 아이들이 그 시금치 같은 독초를 먹느라 입 안이 다 퍼런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안 울 수 있겠어요. 텐트 뒤에 가서 실컷 울고 나오는 거죠.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셔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조금이라도 아이들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괴롭지만 잘 된 일인 것 같아요.

▶ 지금은 대부분이 모르지만 사실, 우리도 그런 시절을 겪었어요. 옛날에 보릿고개 때는 독초를 뜯어 먹기도 하고,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 그게 50~60년대에 겪었던 일들이거든요.

- 그래서 어른들에게 말씀드리면 금방 아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월드비전에 다니면서 6년 동안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우리나라도 도울 사람 많은데 왜 외국 사람까지 도와야 하느냐는 거였어요. 저도 42살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우리나라에서 누굴 돕는다고 그러면 제 앞가림이나 잘하지 했는데, 알고 보니 그렇게 말하는 게 굉장히 민망한 얘기였더라고요. 왜냐하면 1950년부터 시작해서 1990년까지 40년 동안 정말 우리나라가 무지막지한 원조를 받았어요. 1960년도에는 해외 원조가 보건복지부 예산의 3배가 넘은 적도 있어요. 전 세계에서 아프리카가 가장 많은 원조를 받은 것 같지만 절대 아니에요.

우리나라가 가장 많은 원조를 받았대요. 다행히 1991년부터 해외 원조를 완전히 끊고 우리가 도와주는 나라가 되었잖아요. 그런데 도와주는 나라가 됐는데도 한편에서는 그런 냉소적인 이야기들이 있는 거죠. 그러면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1988년 올림픽을 번쩍번쩍하게 치르고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라는 선진국 회원에 가입할 때도 사실은 다른 나라 아이들이 열심히 채운 저금통으로 우리나라 아이들 빵 사주고 다른 나라 할머니들의 손때 묻은 돈을 가지고 우리나라 할머니들의 옷을 사줬다는 얘기에요. 그러면 1990년도까지 우리나라를 도와줬던 그 나라들은 도울 사람 한 명도 없었을까요? 분명히 아닐 겁니다. 세계 경제 대국 12위, 13위를 하는 나라가 돈이 없어서 다른 나라를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긴급구호의 발상지는 원래 대한민국

▶ 월드비전이라는 것이 처음 우리나라 때문에 생겼다고요.

- 저도 깜짝 놀랐어요. 긴급구호를 해야겠다, 난민구호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월드비전 회장님이세요. 저는 월드비전이라고 해서 안경가게인 줄 알았어요. 국제 선글라스 프랜차이즈가 생겼는데 나보고 홍보해달라고 하는구나 했죠. 나중에 회장님을 만나서 명함을 주고받을 때 보니까 그 명함에 있는 로고가 전 세계에 다니면서 수없이 본 거였어요. 특히 아프리카에 그 로고가 보이는 동네 사람들은 사는 거예요. 똑같은 동네라도 하더라도 월드비전이 간 곳은 살고 가지 못한 곳은 살지 못하는 거죠.

우리는 민간단체이다 보니 인원과 자원이 한정되어 있어서 둘 중에서 한 곳만 골라야 하잖아요,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데요. 거의 사정은 비슷해도 둘 중의 하나만 도울 수 있어요. 월드비전은 1950년에, 우리나라의 수많은 전쟁고아와 미망인을 돕기 위해서 한경직 목사님이 한국에서 그 사업을 하시고 피어슨 목사님이라고 미국 목사님이 동네나 교회에 가셔서 돈을 걷어서 만든 단체에요. 그 조그만 긴급구호팀으로 생겨난 것이 지금은 무럭무럭 자라서 전 세계에 100여 곳의 사무실이 있고요, 전 세계 60억 인구 중에서 1억 명을 돌보는 세계 최대의 기독교 민간단체가 됐지요.

▶ 그때 그 수혜를 받은 우리나라의 한비야 씨가 이제는 월드비전의 긴급구호의 팀장이 됐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네요.

- 외부에 나가면 그게 자랑거리에요. 월드비전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당신들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해요. 한 세대만 열심히 도와주면 저렇게 남을 돕는 나라가 되는구나 하면서요.

▶ 정말 열정적으로 삶을 사는 모습 보면 살기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기운이 날 것 같아요.

- 삶은 하나님의 선물이잖아요. 그런데 이것을 99℃까지만 끓이는 것은 너무 아까워요. 99℃도 뜨겁지만 100℃가 되어야 끓잖아요. 그러니까 100℃를 끓이는 삶을 살고 싶어요.

▶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 어릴 때부터 그런 걸 보면 하나님이 저를 그렇게 만드신 것 같아요. 제가 3녀 1남 중의 셋째 딸이거든요. 우리 큰 언니, 작은 언니는 너무 예쁜 공주이고 어머니는 왕비 셨어요. 아버지와 나와 내 동생은 머슴 과였죠. 우리 언니들이 예쁘게 공주처럼 생겨가지고 새침해서 잘 안 하는 심부름을 제가 도맡아서 했어요. 사람들이 칭찬할 때, 첫째 딸, 둘째 딸 너무 미인이다 했다가 셋째 딸인 절 보면 참 똘똘하게 생겼다 그랬거든요. 엄마 아빠는 누군가를 심부름을 시켜야 하는데 저를 시키려고 매일 칭찬하시는 거예요. 셋째가 제일 잘한다, 발 빠른 거 봐라, 그러면 저는 신이 나가지고 심부름을 하는 거예요.(웃음) 또, 예전에는 전화가 많지 않았잖아요.

동네에 청색 전화기가 하나 있는데 아버지가 신문사 기자이셨기 때문에 비상 연락하느라 집에 전화가 있었어요. 그 전화가 동네 전화였던 셈이라 그리로 연락이 다 오잖아요. 제 첫 번째 NGO(non-governmental organization : 비정부기구의 약자)활동이 전화통문 돌리는 거였어요. 누구네 집 아들 낳았대요, 누구네 집 대학교 붙었대요, 누군가 돌아가시면 내가 잘못한 것처럼 모기만한 목소리로 돌아가셨다는데요... 언니들은 너무 예뻤지만 셋이 지나가면 동네 사람들이 제일 저를 반가워하시고 저한테 뭐라도 주려고 하시고 그랬답니다.(웃음)

나는 어릴 때부터 여자 김정호, 이사 가면 동네 지도부터 그려

▶ 그때부터 호기심이 많았어요?

- 궁금한 게 있으면 못 참고 지나가다가도 물어봐야 했어요. 우리 동네에 갑자기 외국인이 나타나잖아요. 저 사람은 흑인인데 이가 왜 저렇게 하얀가, 눈동자는 왜 파란가 하던 일을 멈추고 막 좇아가요. 좇아가면서 한국말로 아저씨 나 파랗게 보여요? 열 살도 안 된 꼬마가. 내가 하도 동네에서 멀리 가고 그러니까 경찰서에도 많이 왔다 갔다 했어요. 새로운 길을 가다 보면 길을 잃어버리고 그러면 경찰서에 들어가서 '아저씨, 나 길 잃어버렸어요' 우리 집 전화번호 대서 엄마가 데리러 오시고. 엄마는 매일 당하는 일이니까 그러려니 하셨어요. 그리고 어렸을 때 이사를 많이 다녔는데 동네를 맨 처음 가면 도대체 어디에 뭐가 있는지 상황을 파악해야 했어요. 동네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면 한 이틀이면 멋있는 지도가 나와요. 그리고 엄마한테 갖다 바쳤죠. 그게 바로 지도에요. 세탁소는 어디 있고 만화방은 어디 있고 뭐는 어디에 있고. 하도 동네 지도를 그려서 별명이 여자 김정호였죠.

▶ 저도 잠시 해외에서 산 적이 있는데 가장 재미있었던 게 안 가본 골목을 가면 새로운 어떤 게 있잖아요. 전혀 없을 것 같았는데 예쁜 가게가 있다던가, 이 골목으로 잘못 들어왔는데 돌다 보면 연결이 되고 다시 골목으로 들어온다든가 이런 경험은 매우 신기했던 거 같아요.

- 여행이야기를 하자면, 여행은 가이드북이 시키는 대로 하면 틀림은 없어요. 돈과 시간도 절약되지만 갔다 오고 나면 뭔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찜찜함이 생기고 추억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약도 하나 가지고 정보도 약간밖에 없는 곳에서 틀린 길로 갔다가 좀 고생도 하다가 아닌 길로 갔다가 돌아서도 왔다가 그런 게 모이고 쌓여서 아주 멋진 경험이 되는 것 같아요. 골목에 들어갔다가 무서우면 나오면 되잖아요. 들어가 보지도 않고 저 골목 무서우면 어떡하나 하는데 발 달렸으니 가보면 되잖아요. 갔다가 이상하면 나오면 되고요. 길은 다 뚫리게 되어 있어요.

▶ 대학을 늦게 들어가신 이유가 있나요?

- 고등학교 때 공부 잘하기도 했고 또 열심히 했어요.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 없이 4형제가 사는 게 그리 녹록하지 않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이름만 똑바로 쓰면 들어간다던 대학을 떨어지고 나서는 바로 동생이 대학을 준비했기 때문에 공부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알고 보면 그것이 인생의 디딤돌이 되었지만 그때는 하늘이 무너진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대학을 안가는 삶을 한 번도 설계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저는 당연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간다는 쪽으로 설계를 해 놨지 대학을 떨어진 이후의 어떤 길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 막막하고 인생의 낙오자 같았죠. 18살, 19살에 완전히 패배자라는 생각에 빠져서 이걸 어떻게 딛고 일어서나 저도 굉장히 헤맸어요. 그래서 제주도에 가서 마음을 달래겠다고 가출을 했어요. 당시에는 졸업하면 고등학교 때 모았던 저금을 주는 게 있었는데 금액이 꽤 됐었어요. 그래서 엄마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넣고 목포에서 밤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제주도를 갔지요.

물론 부산에 무조건 우리를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는, 제가 엉뚱한 짓은 해도 허튼짓은 안 한다고 믿어주는 이모가 계셔서 매일 매일 이모에게 보고는 했어요. 그렇게 자전거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돌고 2주일 만에 왔는데요, 1주일 만에 왔으면 저는 다리몽둥이가 부러졌을 거예요. 우리 엄마가 좀 무섭거든요. 그런데 2주일 만에 오니까 와 줘서 고맙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사전 허가제가 아니라 보고제로 바뀌었어요.(웃음) 제 어깨에 날개가 달린 거죠.

▶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고 대학을 늦게 가셨군요.

- 아르바이트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돈도 모아야 하는데 아르바이트가 굉장히 많았어요. 왜냐하면 그때 제가 학비만 모으는 것이 아니라 생활비도 보태야 했거든요. 일단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아버지가 안 계시니 제 몫이라는 게 있었어요. 동생도 공부한다고 그러죠. 소녀가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언니들 틈에서 삼분의 일은 한 거죠. 그런데 억울한 게 뭐냐 하면 뭘 해도 반값인 거예요. 과외를 해도 고등학교 졸업이라고 반값, 초벌번역을 해도 반값, 제가 워낙 클래식을 좋아해서 클래식 다방 DJ이도 했는데, 그걸 해도 반값. 무조건 고졸이기 때문에 반값이었어요. 고졸 디스카운트라는 게 이런 거구나 생각을 하면서 안 되겠다 싶어서 대학을 가기로 결심을 하고 6년 만에 입학 장학생으로 대학에 들어갔지요.

늦깎이 대학생의 전반전 역전골

▶ 올해 대학교 떨어져서 속상해 하는 학생들에게 한마디만 해주세요.

- "절대로 절망하지 생각하지 마세요. 인생을 전, 후반전이 있는 축구로 놓고 90분으로 삶을 본다면 전반전 45살, 후반전 45살이에요. 지금 고등학교 학생들, 대학을 떨어져서 우울하게 지내는 사람은 많아 봐야 전반전 18,19분을 뛰고 있는 거예요. 골이 한 골 들어간 거죠. 골 한 골 들어갔다고 이제 게임 그만하라는 축구 보셨어요? 그런 축구는 있지도 않아요. 시간은 얼마든지 있어요. 한 골 만회할 수 있는 시간은 전반에 얼마든지 있고요, 후반부에도 얼마든지 있는 거예요. 골을 넣고 만회하고 하는 것은 앞으로 여러분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달려 있어요. 그 1년, 2년이 어렵게 느껴질 거예요. 당연히 어렵게 느껴지죠. 왜냐하면 그 이후를 생각해 보지 않았으니까요. 지금부터 곰곰이 생각해보면 돼요. 내가 이 골 먹은 것을 어떻게 만회를 하고 이 축구를 앞으로 어떻게 아름답고 멋진 페어플레이를 하면서 내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게 할 것인가는 지금부터 여러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고민을 하는가에 달렸어요."

▶ 어릴 때부터 그렇게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썼어요? 책도 많이 읽죠?

- 저는 정말 말을 잘하고 싶고 글도 잘 쓰고 싶어요. 아버지가 주신 문화적 유산 중에서 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 것이 책 읽는 습관이에요. 아버지 서가의 영어 책, 일본어 책을 보면서 아버지가 너무 존경스러웠어요. 가나다라로 쓰여 있는 한국말도 아니고 영어랑 일본 책을 우리 아버지가 읽는다는 사실이 너무 멋졌어요. 또 아버지의 독서 습관이 여백에 뭔가를 써 놓고 밑줄도 치셨어요. 그러니까 적극적인 독서를 하시는 분이었죠. 그게 너무 탐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저도 그래요. 밑줄 치고 옆에 뭐라고 쓰고, 그리고 다 읽고 나면 맨 뒷장에 독후감을 써요. 책 읽고 나면 바로 한 페이지 심지어는 한 줄이라도 써요. 아버지가 하시는 걸 보고 굉장히 샘이 나서, 나도 어른이 되면 저렇게 해야지 한 것이 다행히 몸에 배서 지금까지 오게 됐는데요, 그게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몰라요. 또 하나는 메모하는 습관인데 지금도 여행 다니면서 메모를 하거든요. 아프가니스탄에서 저 날리는 먼지가 밀가루였으면 하는 것은요 적어놓지 않으면 다 잊어버려요. 그 상세한 것을 어떻게 다 기억하겠어요. 그런 생각이 났을 때 마음의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놓지 않으면 이미지만 남지 디테일한 것은 다 잊어버려요. 저는 침대 밑에 화이트보드 같은 것을 놔요. 그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을 잊어버리면 너무 아깝잖아요. 잊어버리면 없어지는 거니까요.

▶ 대학교 졸업하시고 그 이후에 미국유학을 가신 거예요?

- 양부모님이 계시는데 어렸을 때 입양해서 키워주신 게 아니고 정신적으로 무조건 저를 지지하는 부모님이 계세요. 미국분인데 한국에서 근무하셨어요. 클래식 다방 디제이를 한 이유가 판을 한번 올려놓으면 한 20~30분은 가니까 거기서 공부하는 거예요. 그때 쟤가 왜 저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나 유심히 보다가 우연히 말을 나눌 수 있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서울대학교가 다른 곳보다 학비가 굉장히 싸서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그곳을 가지 않으면 대학을 진학할 수 없기 때문에 그걸 목표로 공부를 하고 있다 이야기했죠. 그러고 나서 몇 달이 지났어요. 그분들도 아이들이 4명이나 있는데 어느 날 저한테 진지하게 보자고 하시는 거예요.

시험 볼 때가 다가왔는데, 네가 만약 국립대에 갈 성적이 안 된다거나 떨어지면 어떻게 할 거냐 하셔서 전 그러면 학교를 못 갑니다 했어요. 그랬더니 손을 잡으시면서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거예요. 네가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몇 달 동안 우리가 쭉 지켜봤으니 네가 만약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는 성적이 나와도 꼭 네가 가고 싶은 과를 가라, 학비는 우리가 대 주겠다, 그리고 이건 투자다 이러는 거예요. 생각해 보면 그 분들도 아이들이 있고, 저도 잘 모르는 사람이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인데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제 자존심도 있고 해서 알겠다고만 대답했죠. 그런데 홍익대학교 영문과를 들어가고 특별 장학생이 되어서 4년간 학비가 면제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그 분들이 굉장히 기뻐하시면서 그래도 나는 너에게 투자하고 싶다면서 대학원을 말씀하셨어요. 그분 집이 유타 주에 있어서 유타대학으로 진학을 했지요.

메모는 나의 힘! 마음의 디지털 카메라

▶ 정말 운이 좋은 것 같아요. 열심히 하니까 운이 따라오는 거겠지요.

-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정말 이건 하나님의 은총이에요. 저만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지 저를 쓰시려고 그렇게 하신 게 아닌 가해요. 양부모님이 지금도 살아 계세요. 여름에는 알래스카에 계시고 겨울에는 유타에 계시는데 얼마나 뻐기시는지 몰라요. 한국 사람이 지나가면 '너 비야 한 아냐'고 물어보신대요. 안다고 하면 내 딸이다 그러고 모른다고 하면 '넌 책도 안 읽느냐'고 하고. 정말 그분들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어요.

▶ 세계 일주의 꿈은 대학에 들어갈 때부터 갖고 있었어요?

- 어렸을 때, 여자 김정호라고 불릴 때부터의 꿈이었어요. 세계지도 보면서 저거 걸어서 한 바퀴 돌아야겠다 결심했죠. 대륙이 다 붙어 있잖아요. 우리는 발이 있으니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아주 어릴 때 친구들한테 이야기하면 깜짝 놀라요. 그러면 나는 그 친구들보고 더 깜짝 놀라죠. 지구가 붙어 있는데 걸어가는 게 놀랠 일인가? 그런데 삼박자가 다 맞아야 하는 거잖아요. 돈도 있어야 하고 건강도 있어야 하고 시간도 있어야 하고. 유타 대학에서 3년 동안 국제홍보학을 전공한 이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홍보회사를 3년간 다녔어요. 35살 나이도 젊죠, 3년간 돈 모았으니 돈도 있죠, 회사 그만두면 시간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바로 세계 일주를 떠났어요. 원래는 여행을 3년 갈 생각이었는데 다니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려서 7년 걸렸어요.

(이제 여행을 떠나는 초입인데 이야기는 반도 못 끝났습니다. 그래서 한비야 씨의 양해를 구해 귀한 시간을 더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이어서 들려드리겠습니다.)

※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정리(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녹취작가 이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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