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의 전화영어 2012. 7. 19. 15:21

윤회사상

-신에 이르는 길- 람 다스지음 정신세계사 2004

 

윤회에 대하여 나응 굉장한 체험들을 해보았다. 주로 환각제를 통한 것 이지만 나는 다른 세계로부터 ‘나’라는 이미지의 안팎을 드나들어보았다.크리슈나는 말하기를 “이것은 성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라고 하였다.페르시아의 신비가인 루미는 “ 나는 돌로서 죽었다가 다시 식물로서 태어났다. 나는 식물로 죽었다가 동물이 되었다. 나는 동물로 죽었다가 남자로 태어났다. 내가 왜 두려워 해야 하는가? 나는 다시 사람으로 죽어서 천사들과 함께 솟아오르리라. 하지만 천사도 지나가야만 한다. 만물은 변화하므로. 신의 얼굴만 빼고는 말이다.”

마호메트는 말했다.“인간이란 영혼이 철따라 껴입는 외투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서 낡아지며 버리고 다른 것으로 갈아입는다.”성경을 읽어보면 윤회사상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많이 눈에 띈다. 그리스도는 세례요한이 예전에 엘리야였다고 말한다.

솔로몬의 지혜서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사지멀쩡한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는 것은 전생에 적선을 한 덕분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그가 그 전에 행한 짓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때문입니까? ”

서기 500년에서 600년사이 초기 기독교 공의회는 윤회문제를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처음에는 교리를 어떻게 정할 것인지 전혀 불투명했다. 하지만 장로들이 숙고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윤회개념이 교회를 유지하는데 그리 유용한 사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이 생이 단지 끝이 없는 춤사위속의 한 스텝에 지나지 않는다면 ‘영원한 불지옥인들 뭐가 그리 무섭겠는가? 그래서 윤회개념은 교의로서 배제되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시대에도 그것은 상식적인 믿음이었다. 서양심리학에서도 윤회사상은 배척되어왔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윤회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제는 진지한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티베트의 스승인 라마 아나가리카 고빈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생에 태어났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가장 최근에 태어난 일은 의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활동하는 기억은 우리 의식의 극히 작은 일부분뿐임을 잊어버린다. 하지만 잠재의식은 과거의 모든 인상

과 경험을 모두 보존하고 기록한다. 다만 깨어있는 마음이 그것을 기억해내지 못할 뿐이다.”

칼융은 심리학을 연구하면서 줄곧 잠재의식의 기억이라는 문제와 씨름을 했다.

그는 그것을 집단무의식이라고 이름붙였는데 그것은 서양인으로서 이 생의 경험밖으로부터 오는 정보라는 개념, 윤회라는 개념에 접근해 갈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붓다는 윤회를 ‘무엇인가’가 환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팔리어문헌은 이렇게 말한다.“ 윤회의 바다를 허둥대며 지나가는 에고라는 실체는 없다. 단지 그 성질과 활동에 따라 여기서는 인간으로, 저기서는 동물로, 또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미물로 자신을 드러내는 ‘생명이라는 물결’이 있을 뿐이다.” 힌두교에서는 이것을 미묘한 사념체라고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그 행위와 연결된 욕망에 근거한 바사나, 생명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이 생명의 물결은 밖으로 밖으로 퍼져 나간다. 우리는 죽어도 그것은 계속 퍼져나간다. 그것은 당신의 다음 생을 결정하는 일종의 심령적 DNA코드처럼 작용하는 정신적 경향이다. 힌두교에서는 이것을 ‘카르마’라고 한다.

카르마는 기본적으로 생명의 물결의 한 패턴, 혹은 욕망의 물결이다. 그것은 스스로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삶에서 삶으로 끝없이 유전한다. 스스로 다 소진되고 나면 거기에는 더 이상 개인의 욕망도 ,분리도 없다. 게임이 종료된다. 이 우주와 그속의 당신은 단지 펼쳐지는 카르마법칙의 한 표현물에 불과하다. 당신과 당신주변의 모든 것은 죽었든 살았든간에 완벽한 법칙의 전개일 뿐이다. 그 체계속에 우연은 없고, 이 우주안에 카르마의 법칙에서 예외인 부분은 없다. 현재의 순간은 과거의 모든 카르마의 총합이다. 그저 나를 이 순간 이 곳으로 데려다놓기 위해 끝없이 흐르는 그 모든 삶의 물결의...

 

당신이 시간밖에 서있다면?

이 삶의 물결의 흐름을 몽땅-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카르마의 물결이 퍼져가고 있는 방향을 미리 알 수 있고 , 그것이 왜 그런 식으로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예) 시애틀 강연에서 자살을 하려던 사람과의 시선 교환-호기심으로 그를 보았을 뿐

시야가 깊어지면서 우리는 점차 자신의 삶을 좀 더 폭넓은 맥락에서 경험하디 시작한다. 우리는 삶의 모든 멜로 드라마와 욕망과 고난을 들여다 보기 시작하고, 그것을 탄생과 죽음이라는 경계선안에 한정되어 일어나는 사건들로 보는 대신 그보다 훨씬 더 광대한 설계의 일부로 경험하기 시작한다.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더 큰 틀이 dslT고, 이 삶은 그 속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었지만 옛 카르마를 소진시키면서 40년을 보냈다.게임의 정체를 꿰뚫고 있다고 하더라도 춤사위는 제풀에 사그라들대까지 계속된다.쌓아놓은 카르마의 에너지가 남아있는 한 생명의 물결이 남아 있는 한 다섯 스칸다,곧 창조의 실가닥은 계석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