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는 나의 휴식처
한동안 블로그에서 쉬지 못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해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바쁠 수록 자주 들러 영상시를 감상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어야 하는데
어머니 떠나시고 한동안은 음악이 음악으로 들리지 않고
공허한 소음으로 들려 음악도 멀리했다.
아직도 안전히 귀가 제자리를 잡지는 않았지만
아주 조용하고 아름다운 음악은 그래도 조금씩 귀에 들어온다.
동생이 오디오 메니아라 좋은 음악을 많이 들었는데
어머니 가신 뒤 아름다운 음악이 음악으로
안들리더라기에 그 발에 나도 공감했다.
나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다가
눈에 맑음이 사라지면 그것은 자신에 대한 오렌지경보이다.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의 눈에 핏발이 서 있으면
삶을 치열하게 사는구나 싶어 안쓰럽다.
나라도 차분한 마음을 유지해야지 다시 각오한다.
요즘 얼굴에 초조한 빛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다.
소녀시절과 같은 맑은 눈을 유지하는 것,
10대의 순수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간직하는 것,
마음에 욕심이 생기면 끌어내리는 것
그것이 나의 인생의 긴 여정의 작은 과제이다.
어릴 적 손바닥에 눈깔사탕을 쥐고 내려다보며
이런 다짐을 한적이 있었다.
나는 어른이 되어도 지금 눈깔사탕을 쥐고
만족한 그 마음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
그것이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니
1학년쯤 이었을 것이다.
나는 전생에 필시 청렴하게 살다간
스님이거나 선비이거나 절실한 종교인이었을 것 같다.
어린 시절,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는 안빈낙도를
결심을 했으니 .
그리고 마음에 욕심이 생기면 스스로를
다ㄱ그쳐서 결국은 빈 몸으로 돌아가고 마니
그저 걱정없이 청빈하게 살아가면 가장 나다운 것임을
최근에 절실히 깨달았다.
지금까지 힘들었던 것은 나답지 않게
조금의 더 큰 여유를 바랬던 이유였음을.
그것은 나지신보다 자식들을 위함이었음을
다섯살 경인가,
미군들이 나누어주는 옥수수죽을
줄을 서서 배급타는 광경을 기억한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되지 않은 때라 주위의 집은
오래된 기와와 판자집이 많았고
한 집에 여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살고
펌프로 물을 길어먹던 때였다.
그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사람들이 잘 산다고 흥청거리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자신을 철저히 지켜내는 사람이 우러름을 받는 요즙,
그래도 세상이 유지되는 것은
꿋꿋한 기상을 지키는 어른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