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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환 수채화와 나의 화우들

헬렌의 전화영어 2008. 12. 30. 12:59

 

 

 오랫만에 수채화를 감상했다.

한 때 나의 스승이었던 박철환선생의 수채화를 보니 그 시절이 떠오른다.

박선생의 그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섬세함과 단호함, 자신만만한 텃치와

세밀하고도 아름답고 현란하지 않은 색감, 그만의 독특한 색채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 분의 쌍문동화실은 연일 그림을 배우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수많은 여인들이 드나들어도 박선생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끊임없이 뱉어내는 작품은 학생들의 마음마저 좋은 작품에 대한 열망으로 고취시켰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모두 화가이다 , 그림을 잘 그려도, 못그려도 붓을 들고 있는 한 그들은 모두 화가이다. 잘 그리는 사람만이 화가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 화실에는 대학에서 그림을 전공하고 주부로써 충실하다가 그림에 대한 열정을 못이겨 다시 시작한 사람도 박선생의 그림앞에서는 늘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고, 그림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부모의 '배고픈 직업'이라는 반대로 가까이 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재능을 나타내는 주부도 왔는데 박선생은 그들의  숨어 있는 재능과 끼를  찾아내는데 명수였다,

정말 멋진 여인들과 멋진 그림을 매일 접한 황홀한  시절이었다.

 

연세는 들었지만 화구를 들고 우이동으로 북한산, 북한강으로 야외스케치를 한번도 빠지지 않던 분들도 참 멋지게 늙고 있구나 늘 감탄하곤 했다. 화우회라는 모임으로 20여명이 활동하던 때 전시회비용을 위해 이애자회장과 방송국에 방영를 요청하러 무조건 쳐들어가 이계진아나운서와 막닥뜨려 부탁하고 아침 주부프로그램에 작품소개와 함께 오랜 시간 방영되는 영광도 누렸다.

 

화가들이 운영하는 교외의 카페에 다니며 전시회캐더로그에 광고비 명목으로 찬조금을 받던 일도 보람있었던 일이었다, 그 중에도 뚜렷한 자기의 색갈과 개성을 지닌 각 회원들과 하나하나 친하게 지내며 나름대로 독특한 화우관계를 유지했다.

토요일이면  화실에 누드모델을 채용해서 회원들의 실력연마에 열중하던 시절,그 때 신들리듯이 그려낸 그림중에는 박선생님마저 감탄하시던 그림도 몇개 나왔다.

지금은 미국으로 오는 소용돌이속에서  누구의 수중에 있는 지도 모르는 그림들이지만 마치 시집보낸 딸을 그리워하 듯 늘 그리운 그림들이다.

 

박선생님도 화실 학생들의 그림지도에 무척 열심이셨고 수채화공모전에 나가는 사람들에게 신신당부하던 말이 있다. 그림을 한번 시작한 이상 절대로 중단하면 안된다고. 여러분이 수채화공모전에 나가 수상을 한다면 그것은 책임이 따르는 일이니 그림을 전공한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그 선생님의 열성과 학생들의 그림에 대한 열기가 정말 뜨거웠던 때였다.

 

  하루는 박선생님이 멋진 수채화전집을 내려 하는데 영문번역을 내게 부탁하셨다. 내가 화실을 떠날 때까지 시작못하셨는데 그동안 책은 나왔는지, 영문판도 내셨는지, 아직도 내가 도와드릴 기회는 남아 있는지 연락이 된다면 여쭙고 싶다.

지금도 그 곳에는 그런 열기가 남아 있을까?

 

  그림에 대한 욕심, 작품에 대한 열기가 하늘을 찌르던 그때의 열정이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다. 지금은 현실의 삶에 얽매어  붓을 못들고 있지만 미국에 와서 밤낮없이 일하며 영주권을 따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투잡을 뛸 때조차도 그림에 대한 소망을 놓지 않고 소품들을 그렸다. 한 때는 집안 가득 그림을 붙여놓고 홀로 전시회도 하고 혼자 행복해 했다.

처음 미국에 와서 가구가 없을 때도 그림이 벽을 가득 메우니 집안이  얼마나 가득차 보였는지 모른다.

 

 

그림을 그리던 그때는 나의 인생의 가장 고통스런 전환기였었다.

남편의 사업은 기울었고 ,빚에 쪼들리며 오랜 병구완에 몸도 마음도  지쳐갈 무렵, 타고난 긍정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돌파구를 찾던 내게 그림은   자신을 붙잡기 위한 한오라기 지푸라기였다. 그의 사업뒤치닥거리를 하면서  병원을 들락거리는 나날속에서도  나 자신을 놓지 않으려는 치열한 나와의 싸움이었다.

나이 사십만 넘으면 나자신을 위한 일도 할 수 있겠지 하며 남편과 아이들만을 위해 살던 시절 아르바이트로 모아놓은 돈들도 모두 그의 방만한 사업경영에 다 부었고 급기야는 친정 식구들 조차 모두 망하게 만드는 수순을 밟고 있었다.

 

 그래도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하면 그림그리던 친구들이 나의 그림을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올려주었고 같이 그림그리던 사람들이 아파트에 친구들을 모아놓고 지도해달라고 초빙해 그룹지도도 하곤 했던 그 순간만은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누드크로키를 위해 서로 옷을 벗어주는 그룹도 만들었고 ,돈 안들이고 현명하게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들로 늘 빈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언제나 나의 주변에는 열정이 있는 사람들로만 가득찼었다. 모두들 그리운 얼굴들이다.

 

  멋진 여인이 유난히 많았던 곳이었다.  해림씨는 마음씨나 행동이 정말 공주같았고 ,왕비같은 우아함과 품위를 가진 친구도 있어 같은 여자들도 시샘하곤 하던 사람도, 보스같고 과감하고 자신있게 자기만의 색채를 가진 멋진 친구도 만났고,, 이영애를 닮아 맑고 깔끔한 이미지의 현선이도 무척 나를 따랐다. 자기를 다시 만날 때까지 늙지마,하던게 마지막 인사였는데,

 

 어느 추운 겨울날 새벽 6시쯤 전화벨이 울렸다.

'언니 첫눈이 와서  간밤에 많이 쌓였어,창밖을 내다봐, 우리 첫눈맞으러 산에 올라가자,'하고 현선이 전화한 것이었다. 아기가 둘이나 되는 30대 초반의 아줌마였지만 그녀는 대학 초년생보다 더 풋풋하고 예쁜  외모와 마음을 간직하고 있어 같은 여자가 보아도 매력덩어리였다.

 게다가 센스도 있고 예술성도 누구보다 강하고 자부심이 많아 좋은 작품을 그려내는 그녀를 누가 싫어할 수 있으랴.

그 녀도 남편의 주식투자가 IMF 와 맛물려 실패를 하고 방황을 하던 때라 어려움속에서도 스스로를 추스리려 애쓰고 있을 때였다.

 

우이동골짜기에 올라가 새벽녘

 어스름하게 동이 터오는 눈길을 밟으며

어린아이처럼 깔깔대며 북한산 눈속에 스트레스를 날려버렸다. 그날 카메라에 담아온 광경은

 그림이 되어 아직도 우리집 벽에 걸려있다.

그림에 대한 열망이 언젠가 우리를 그림안에서 다시 만나게 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이제 나이들어 다시 모을 것이다.

같이 모여 그림그릴 곳을 내가 마련할 것이다.

식구들 뒷바라지로 여념이 없어 그들은 못하지만 나는 늘 마지막 사업으로 새기는 그림이 하나 있다.

 들장미로 담장을 두르고 앞뒤뜰에 들꽃을 가득채워 봄 여름 가을 각기 다른 꽃들이 무리지어 피도록 산비탈을 가꾸어 그들이 다시 모이도록 할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한번쯤은 모두 다녀가고 싶어하는 꽃동산을 가꾸어 놓을 것이다. 지금도 열심히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 '타샤의 정원'처럼 보라, 노랑, 빨강, 분홍색꽃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커다란 꽃동산을 만들 것이다.